사야마 사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야마 사건(狭山事件)은 1963년 5월 1일 사이타마현 사야마시에서 1학년 여고생이 유괴, 살해된 살인사건. 지원단체가 무죄 가능성을 주장하면서 피고인을 지원하고 있다. (2006년 현재)
이 사건은 흉악범죄 사건으로서 세상의 이목을 모았고, 1963년 5월 23일 용의자로서 이시가와 카즈오(당시 24세)가 체포되었지만, 1심 사형판결 후에 무죄를 주장했다. 용의자가 피차별부락 출신이어서, 이 사건은 부락차별의 의심을 사면서 크게 취급되었다. 그 후, 무기징역 형이 확정되어 이시가와는 복역하게 되었으나, 이시가와와 변호인단 및 지원단체들은 부락차별에 근거한 누명이라면서 재심청구를 냈다. 사야마차별재판으로도 불린다.
유괴살인사건 개요
1963년 5월 1일, 한 농민의 네째딸인 고교1년생 나카다 요시에(中田善枝 당시 16세)가 오후 6시가 지나도록 귀가하지 않고 행방불명이 되었다. 오후 6시 50분 무렵, 여동생이 걱정된 장남(당시 25세)이 차를 타고 학교에 가 소재를 물었지만 확인하지 못하고 오후 7시 30분쯤 귀가했다. 10 분후인 오후 7시 40분쯤, 장남이 현관의 유리문에 끼워 있던 흰 봉투를 발견했다. 봉투 안에는 「아이의 목숨을 구하고 싶으면, 5월 2일 밤 12시에 여자에게 20만엔을 들려 사노야주점 문 앞에서 기다리게 하라」는 협박장이 들어 있었다. 협박장에는 「경찰에 알리면 아이는 죽는다)」 「반복하지만, 경찰에 알리지 말아라. 이웃에게도 알리지 말라. 알리면 아이는 죽는다」 등이 쓰여 있었지만, 장남은 오후 7시 50분쯤 호리가네 파출소에 신고했고, 파출소는 다시 사야마 경찰서에 연락했다. 경찰은 유괴사건이라고 단정하고 긴급 수사체제를 편성했다.
2일 밤, 차녀(당시 23세)는 몸값 전달 장소에서 위조지폐 20만엔을 들고 범인을 기다렸다. 차녀는 범인과 두세마디를 나눴지만, 범인은 경찰잠복을 눈치채고 도망쳐 버렸다. 이 때, 40여명의 경찰이 잠복하고 있었으나 현장에서 범인을 놓쳐 버렸다. 사이타마 현경 본부장은 「범인은 반드시 현지인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가까운 시일내에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발언, 나카 이사오 수사 본부장도 「범인이 주변지리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수사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가까운 시일내로 사건을 해결하고 싶다」고 발언했다.
3일 새벽, 수사중에 범인의 발자국 같은 것이 사노야 동남 방향의 밭에서 발견되었다. 수사관은 경찰견을 앞세워 발자국 냄새을 쫒아갔지만, 오가와 근처에서 추적이 곤란하게 되었다. 발자국/냄새가 사라진 장소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양돈장이 있었다. 그 양돈장의 경영자, 가족과 종업원은 사야마시내 피차별부락 출신이었다.
4일 오전 10시 반, 소녀의 사체가 잡목림에서 보리밭으로 이어지는 길에 매장된재로 발견되었다. 그날 밤, 사이타마현경에 의뢰로 나카다 자택 앞마당에서 부검이 실시되었다.
사인은 목을 맨 것에 의한 질식사. 손가락의 자취가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손으로 목을 조른 경우는 아니다.
소녀는 생전에 성관계가 있었으며, 저항한 상처는 없었다. 정액에서 검출된 혈액형은 B형이었다.
위안에는 음식이 250 ml 남아 있었다. 법의학에서 이는 마지막 식사한 후부터 2시간, 늦어도 3시간 이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상 경과하면 위안의 음식은 거의 장으로 이동해 버린다). 또, 위 안에는 토마토가 남아 있었지만, 후에 동급생이 법정에서 증언한 바에 의하면, 피해자가 당일 12 시경 점심으로 먹은 카레라이스 및 반찬에는 토마토가 들어가 있지 않았다.
1963년 3월 31일에 일어난 전후최대의 유괴사건, 「요시노부짱 사건」에서 범인을 놓친 경찰은, 그 다음에 일어난 사야마사건의 유괴범인을 놓친데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시체가 발견된 4일에는 카시와무라 경찰청 장관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사이타마 현경은 165명에 이르는 수사본부를 발족시켰지만 수사는 난항. 사체가 발견된 2일 후인 5월 6일, 피해자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한 적이 있는 운송회사 종업원(B형)이 원인불명의 자살을 했다. 특수 본부는 양돈장 경영자로부터 삽 분실신고를 입수했다. 경찰은 양돈장에 출입하던 피차별 부락민으로 목표를 좁히고, 특명수사반을 조직 해 피차별 부락민에 대한 수사를 개시했다. 당시 국가공안위원장인시노다는 「이런 악질적인 범인은, 어떻게 해서든지 반드시 산 채로 잡는다」라고 발표했다.
11일 오후 5시경, 사야마시 이루마가와 토우사토의 밀밭에서 도둑맞은 삽이 발견되었다.거기서 삽에 묻은 흙을 조사했는데, 사체를 묻은 지점의 흙과 같은 것이라고 하는 감정 결과가 나오면서 사체를 묻었을 때에 사용한 삽이라고 인정되었다.
같은 달 23일, 사체유기현장 가까이에 있는 피차별 부락에 사는 이시가와 카즈오(당시 24세:혈액형은 B형)가 싸움, 상의(옷) 절도등의 용의의 건으로 체포되었다. 그 부락에는 양돈장 관계자가 대부분 살고 있고, 청년은 사건 3개월 전까지 양돈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쿄도통신사는, 체포 전부터 이시가와가 유력용의자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어, 체포 전날인 22일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던 청년을 촬영했다. 또 경찰은, 보도진에게 체포당일부터 「필적 등으로 청년이 범인인 것을 확신하고 있다」라고 발표했다. 경찰은 20일 이상에 걸쳐서 조사를 실시했지만 청년은 자백을 하지 않고, 변호사의 가석방 신청이 인정되면서 6월 17일에 석방되지만, 석방 직후에 경찰은 본건(강도, 강간, 살인, 사체유기 용의)으로 이시가와를 재체포했다.
재체포된 청년은,6월 20일에 우선 「3명이서 피해자를 간음·살해했다」고 자백했다. 나아가 6월 21일, 청년은 소녀의 가방을 버린 장소를 지도로 그려주었고, 이 자백에 근거해 가방이 발견되었다. 6월 24일에는 청년이 단독범행을 자백했다. 6월 26일에는 자택을 재차 수색해 범죄에 사용한 만년필을 발견했다. 나아가 7월 2일, 청년의 자백에 근거해 손목시계를 버린 장소 부근에서, 시계가 발견되었다.
동년 7월 9일, 당시의 우라와지방법원 (현 사이타마 지법)은 「강도 강간 사체유기」로 이시가와를 기소.1심에서 이시가와는 범행을 시종 인정하고 1964년 3월 11일 사형판결을 받는다. 3월 12일 청년은 공소했다. 9월 10일 도쿄 고법에서 공소심의 제1회 공판이 열렸다. 이 때, 청년은, 집요한 조사, 허위의 사법거래 등에 의해 자백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하면서 1심에서 인정한 범행을 전면 부인했다. 그리고 현재도 지원그룹의 지원을 받으면서 계속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지원활동
사건 발생 당시, 피고에게는 자유법조단의 변호사, 일본국민구원회 등, 일본 공산당 영향하에 있는 단체가 지원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69년 11월, 피차별부락출신 학생에 의한 「사야마 차별 재판 규탄」을 내건 「우라와 지방법원 점거투쟁」이 시작되어, 이 근래부터 부락해방동맹이 본격적으로 사야마 재판에 나서게 된다. 해방동맹은 행진이나 서명 운동 등, 재판에 대한 항의를 했다.
그 후, 일본 공산당은 기관지「적기」1977년 12월 2일호와 3일호에서 견해를 발표하고, 「해방 동맹이 지원 활동을 혼란시켰다」고 강하게 비난 했다. 이후, 공산당계 단체는 지원활동에서 멀어졌다.또, 1심 이래의 변호사도 변호인단에서 이탈했다.
판결 후
1974년 10월 31일 도쿄 고법은 변호단의 주장을 기각하고 「무기징역」의 판결을 내렸다. 2심 판결 후, 변호단은 새로운 증거를 보강해 상고했지만, 1976년 8월 16일 최고재판소는 상고를 기각했다.그 결과이시가와의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9월 8일 치바 교도소에 입소했다. 변호인단은 그 후에도 이의제기, 재심 청구를 제출하지만 기각·각하가 계속 되고 있다.
1994년 12월 21일 이시가와는 31년 7개월만에 가출옥했다. 관동지방 갱생 보호 위원회가 이시가와의 가출옥을 공표했지만, 출소한 것을 일반적으로 공표하는 것은 지극히 이례이다.그 밖에 공표한 케이스는, 코베 아동 연속 살상사건의 가해자, 소년 A(당시 14세)가 관동 의료소년원을 가퇴원했을 때 뿐이다.
2005년 3월 16일, 최고재판소 제1소법정은 제2차 재심 청구의 특별항고를 기각했다.
2006년 5월 23일, 지원단체와 이시가와는 도쿄 고등재판소에 제3차 재심을 청구했다.